단순한 게 좋아 - Simple is best

" 생각 "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6/12/10 수첩 이야기 (33)

수첩 이야기


  군대에 있었을 때는 주머니에 항상 수첩을 넣고 다녔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또 하면서 무언가 재미있다 싶은 것들은 빼놓지 않고 적어 두었다. 다른 오락거리가 전무한 곳이기도 했으려니와,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보면 머릿속에 수많은 잡상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또 떠오르곤 했었다. 위병소에서 근무를 설 때, 내무실에서 책을 읽을 때, 모포를 덮고 눈을 감았을 때…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생각은 끊이지 않고 꼬리를 물듯 계속해서 이어져 갔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간단한 필기를 통해 수첩에 메모했다. 나중에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어도 시간이 남는다 싶으면 수첩을 꺼내들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갑자기 뇌리를 스쳐가는 게 있었고, 그런 작은 편린들도 어김없이 수첩의 빈 공간 한 구석에 그 존재를 남기게 되었다. 지금 떠올려 보면 참으로 충실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전역한 지 8개월이 다 되어 가는 지금, 나는 아직도 수첩을 들고 다닌다. 하지만 그 수첩을 펴보는 일은 크게 줄어들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이 많아진 탓도 있고, 더 이상 머릿 속에서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는 일도 줄어들었다. 생각을 곱씹어 가며 정리하여 수첩에 적기보다는, 대충 구상되었다 싶으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만드는 일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몇 번이고 고쳐쓰는 만큼 시간이 더더욱 낭비될 뿐이었다. 지금 수첩에 적힌 건 일상에 필요한 기록들, 즉 누군가의 전화번호나 아르바이트 정보 등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들 뿐이다. 이것은 그저 암기(暗記)의 대용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두든 기억하든 그 내용 자체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하나의 데이터이고, 먼 훗날 그것을 찾아본다 해도 그것이 스스로 변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라도 변화할 수 있는 머릿 속의 난삽한 생각들, 그것이야말로 내게 있어서는 반드시 기록해야 할 것들이 아니겠는가.

  나는 곧 시간을 내서 새 수첩을 살 것이다. 그리고 그 첫 표지에는 지금까지 내가 구상해온 것들의 목록을 적을 것이다. 그것들을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또한 나는 지금까지의 그것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상상할 것이다. 가만히 앉아 시간을 때우기보다는 길거리를 걸어다니며 더 많은 것을 볼 것이다. 거기서 떠오른 것들을 수첩에 적어 둘 것이다. 언젠가 그것을 뒤적이며 하나씩 다듬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top